
진격의 거인 3기를 처음 볼 때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거인을 베는 장면 대신 정치와 음모가 화면을 가득 채웠고, 저도 초반에는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그런데 다 보고 나서야 깨달았습니다. 3기야말로 진격의 거인이 단순한 액션 애니메이션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시즌이라는 것을.
왕정의 비밀, 적은 거인이 아니었다
3기에서 가장 먼저 체감한 변화는 적의 정체였습니다. 거인을 상대하던 조사병단이 이번엔 인간, 그것도 같은 편이어야 할 왕정(王政)과 정면으로 맞붙습니다. 왕정이란 벽 안의 지배 체제를 뜻하는데, 이들은 수백 년간 인류에게 거인의 공포를 방패 삼아 진실을 숨겨온 집단입니다. 닉 사제가 중앙 헌병에 의해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저는 꽤 충격을 받았습니다. 거인이 아닌 인간이 인간을 제거하는 장면이 오히려 더 섬뜩하게 다가왔습니다.
대인 입체기동이라는 개념도 3기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대인 입체기동이란 거인이 아닌 사람을 상대하기 위해 특화된 전투 방식으로, 기존의 입체기동 장치를 대인 전투에 맞게 개조한 형태입니다. 케니 아커만이 이끄는 대인 전투 부대가 이 방식을 능숙하게 구사하면서 리바이조차 고전하는 장면은 꽤 긴장감이 있었습니다. 리바이와 케니가 과거를 공유한 사이라는 사실도 이 대목에서 서서히 드러납니다.
히스토리아 레이스의 왕가 혈통도 이 시점에 본격적으로 조명됩니다. 시조의 거인이란 벽 안의 모든 거인을 지배하고 인류의 기억을 조작할 수 있는 특수한 능력을 지닌 거인을 말하는데, 이 힘이 레이스 왕가에 대대로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집니다. 그리고 히스토리아의 아버지 로드 레이스는 딸에게 에렌을 먹고 시조의 힘을 되찾으라고 강요합니다. 직접 보면서 느낀 건, 히스토리아가 그 명령을 거부하고 "나는 누구의 인형도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순간이 3기 전반부의 감정적 정점이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결단이 이후 그녀가 여왕으로 즉위하는 서사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쿠데타(coup d'état), 즉 기존 권력 체제를 무력으로 전복하는 정치적 행동도 3기의 핵심 사건입니다. 조사병단은 반역자로 몰린 상황에서도 거인 습격이라는 비상사태를 역이용해 구 왕정을 붕괴시키는 데 성공합니다. 애니메이션 속 정치 드라마가 이 정도 밀도로 전개되는 경우는 흔치 않다고 생각합니다.
에르빈의 선택, 가장 슬프고 가장 위대한 순간
월 마리아(Wall Maria) 탈환 작전은 3기 후반부의 무게 중심입니다. 월 마리아란 세 겹으로 구성된 벽 중 가장 바깥쪽 벽으로, 5년 전 거인에게 함락된 이후 인류가 잃어버린 땅입니다. 이 탈환 과정에서 조사병단은 엄청난 희생을 치릅니다. 제가 직접 보면서 느꼈던 것은, 작전 중반부터 등장인물들의 생사가 너무 빠르게 결정된다는 점이었습니다. 감정을 추스를 틈도 없이 다음 장면으로 넘어가면서 오히려 그 공허함이 전쟁의 잔혹함을 더 잘 표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3기 최고의 명장면이라고 제가 감히 말할 수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에르빈과 아르민 중 한 명만 살릴 수 있는 선택의 순간입니다. 당시 상황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 아르민은 초대형 거인 베르톨트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하지만 치명상을 입어 생사의 기로에 선다.
- 에르빈 단장 역시 짐승 거인의 투석 공격으로 죽음 직전의 상태에 놓인다.
- 남은 거인화 주사는 단 하나뿐이고, 리바이는 그 선택을 홀로 감당해야 한다.
- 리바이는 결국 에르빈에게 휴식을 주기로 결정하고, 아르민에게 주사를 놓아 베르톨트를 포식하게 한다.
이 선택을 단순히 "누구를 살렸는가"로 보면 핵심을 놓칩니다. 리바이가 에르빈을 포기한 것은 그가 덜 중요해서가 아니라, 평생 꿈을 위해 싸워온 사람을 이제 쉬게 해주기 위한 선택이었다고 저는 해석했습니다. 에르빈이 병사들을 지옥으로 이끌며 희생을 자처하는 돌격 장면은 그 자체로도 비극적인데, 그것이 리바이를 위한 단 한 번의 기회를 만들어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알고 나면 더 무거워집니다.
베르톨트 역시 빼놓을 수 없습니다. 초대형 거인이란 벽을 단번에 파괴할 수 있는 압도적 파괴력을 지닌 거인 계승자를 말하는데, 베르톨트는 그 능력자이면서도 정작 자신이 옳은지조차 확신하지 못하고 죽습니다. 친구들을 속인 죄책감과 자신의 신념 사이에서 끝내 답을 찾지 못한 채 사라지는 모습이 오히려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악역이라기보다 불쌍한 캐릭터로 남은 이유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애니메이션 속 이런 서사 구조는 일본 애니메이션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은 바 있으며, 진격의 거인은 캐릭터의 도덕적 딜레마를 정면으로 다루는 작품으로 평가됩니다(출처: Anime News Network).
지하실의 진실, 이야기가 세계로 확장된다
시간시나 구(Shiganshina District) 탈환에 성공한 뒤 에렌 일행이 마침내 아버지 그리샤 예거의 지하실 문을 여는 장면은 시리즈 전체를 통틀어 가장 기다려온 순간이었습니다. 제 경험상 이건 좀 달랐습니다. 보통 '반전'이라고 하면 예상을 완전히 뒤집는 식인데, 지하실에서 나오는 진실은 뒤집는다기보다 이야기 전체의 크기를 수십 배로 늘려버리는 느낌이었습니다.
지하실에는 책과 사진이 남겨져 있었고, 그를 통해 파라디 섬 밖에 마레 제국(Marley)이 존재한다는 사실, 거인들이 사실 인간에서 변형된 존재라는 사실, 그리고 에렌의 이복형이 바로 짐승 거인의 계승자 지크 예거라는 사실이 한꺼번에 드러납니다. 진격의 거인이라는 특정 거인의 능력명이 작품 제목과 동일하다는 것도 이 시점에 의미심장하게 등장합니다. 진격의 거인이란 미래의 기억을 볼 수 있고 앞으로 나아가는 힘을 지닌 특수한 거인 계승 능력을 말합니다.
그리샤 예거가 레이스 일가를 몰살하고 시조의 거인 능력을 빼앗았다는 기억의 조각도 에렌의 시점으로 전달됩니다. 제가 직접 이 부분을 보면서 느낀 건 에렌의 혼란이 화면 밖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는 겁니다. 아버지를 믿었던 만큼 그 진실이 더 잔인하게 다가왔습니다.
3기의 마지막 장면, 조사병단이 처음으로 바다에 도달하는 장면은 달성감보다 공허함에 가까웠습니다. 어릴 때부터 자유의 상징으로 꿈꿔온 바다에 도달했지만, 에렌은 "이 바다 너머에 적이 있다"고 말합니다. 자유를 얻었다고 생각한 순간 더 큰 싸움이 시작된다는 것을 직감하는 장면으로, 이야기가 '벽 안의 생존'에서 '세계 전체를 둘러싼 갈등'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을 이보다 선명하게 표현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습니다. 진격의 거인의 세계관 변천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Attack on Titan Wiki에서 상세한 설정 자료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3기는 분명 액션 밀도만 놓고 보면 1, 2기보다 낮습니다. 저도 전반부는 살짝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세계관 설명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탓에 처음 볼 때는 따라가기 버거운 부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치 파트가 끝나고 월 마리아 탈환 작전으로 진입하는 순간부터는 그 어떤 시즌보다 밀도 있게 느껴졌습니다. 3기가 없으면 4기는 성립하지 않습니다. 아직 4기를 안 보셨다면, 3기를 다시 한번 정주행하고 나서 이어 보시길 권합니다. 처음 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무게로 다가올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