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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이건 (불살 신념, 울프우드, 나이브스)

현상금 600억 더블 달러. 이 숫자만 보면 엄청난 흉악범을 상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막상 등장한 바슈 더 스탬피드는 도넛을 입에 달고 다니며 여자만 보면 정신을 못 차리는 얼빠진 청년이었습니다. 저도 처음엔 "이게 맞나?" 싶었습니다.
보험 조사원 메릴 스트라이프와 밀리 톰슨조차 이런 인물이 전설의 인간 태풍일 리 없다며 의심합니다. 하지만 이네프릴 시티에서 바슈가 권총을 뽑아 진짜 실력을 드러내는 순간, 작품의 분위기도 완전히 달라집니다.
다 보고 나서 돌아보니 초반의 유쾌한 모습은 수많은 생명의 무게와 고독을 감추기 위한 가면처럼 느껴졌습니다. 바슈는 처음부터 같은 사람이었지만, 그를 바라보는 제 시선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불살 신념, 실제로 들어보면 황당하게 들립니다

바슈의 철학은 단순합니다. "아무리 악인이라도 절대 죽여서는 안 된다." 불살이라는 신념 자체가 말은 쉽지만, 작품 상황 속에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선택처럼 보였습니다. 처음 들으면 솔직히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먼저 듭니다. 제가 직접 이 작품을 보면서 느낀 것도 그랬습니다. "저 상황에서도 안 쏜다고?"라는 반응이 나오는 장면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신념이 흔들리는 과정 자체가 트라이건의 핵심 드라마입니다. 나이브스의 명령을 받아 암살 집단 갠호 건즈(Gung-Ho Guns)를 지휘하는 레가트 블루서머는 처음부터 끝까지 바슈의 정신을 무너뜨리는 데 집중합니다. 단순히 싸움을 거는 게 아니라 바슈가 지키려는 사람들을 인질로 삼고, 누명을 씌우고, 선택지를 좁혀 갑니다.
바슈는 악인이라도 죽여서는 안 된다는 불살을 고집하지만, 울프우드는 더 많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때로는 적을 죽여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레가트는 바슈의 신념 자체를 무너뜨리려 하고, 나이브스는 인간이라는 종족을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서로 다른 네 가지 입장이 하나의 이야기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합니다. 단순한 선악 구도가 아니라는 점에서 트라이건은 다른 배틀 애니메이션과 결이 다릅니다.

울프우드가 없었다면, 바슈의 신념은 공허했을 겁니다

유랑 목사 니콜라스 D. 울프우드는 제가 트라이건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입니다. 거대한 십자가 형태의 복합 무기 '퍼니셔'를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이 남자는, 외형만 보면 그냥 강한 조력자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이 인물이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계속 흔들리는 모습이 바슈의 이야기만큼이나 묵직합니다.
울프우드는 어린 시절 채플 더 에버그린에게 거두어져 총잡이로 길러졌고, 고아원을 지키기 위해 나이브스 측의 명령을 따르며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바슈를 죽이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스승 채플과 맞섭니다. 채플을 쓰러뜨린 뒤에도 레가트의 능력으로 조종당한 채플에게 총을 맞으면서, 울프우드는 생의 마지막을 맞이합니다. 저는 이 장면을 보면서 예상보다 훨씬 크게 흔들렸습니다. 죽기 직전 울프우드가 남기는 말과 행동이 바슈의 이후 선택에 직접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단순한 조역의 퇴장이 아니라, 서사적으로 바슈의 신념을 다시 세우는 장치로 작동합니다.
두 사람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한 적과 맞서는 과정에서 살생 여부를 두고 정면으로 충돌하는 장면은 트라이건 전체에서 가장 긴 여운을 남긴 장면 중 하나였습니다. 어느 쪽이 옳은지 쉽게 판단하기 어렵다는 게 이 작품이 가진 힘입니다. 캐릭터 각자의 논리가 다 성립하기 때문입니다.
나이토 야스히로의 만화를 원작으로 제작된 1998년 애니메이션은 유쾌한 총격 액션으로 시작하면서도, 불살과 인간의 가치라는 질문을 끝까지 놓지 않습니다. 오래된 작품인데도 바슈와 울프우드의 신념 충돌이 지금까지 기억에 남는 이유였습니다.

나이브스와의 결전, 그 끝이 씁쓸하게 좋았습니다

바슈와 밀리언즈 나이브스는 형제이자 완전한 대립항입니다. 두 사람은 인간이 아니라 이민선에서 태어난 인간형 독립 플랜트라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같은 기원에서 출발했지만, 렘 세이브렘의 영향을 깊게 받은 바슈와 인간 말살을 신조로 삼는 나이브스는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가 됩니다.
이민선 추락 사건은 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입니다. 나이브스의 음모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바슈는 형에 대한 증오와 삶의 책임감을 동시에 짊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줄라이 시티 괴멸 이후 현상금 범죄자로 낙인찍히면서, 바슈는 자신이 지키려는 세계로부터 오해받는 존재가 됩니다. 이 설정이 트라이건의 비극성을 관통합니다.
레가트가 메릴과 밀리를 인질로 잡으면서 바슈는 결국 방아쇠를 당깁니다. 이 장면이 개인적으로는 트라이건 최고의 장면이었습니다. 처절하게 오열하는 바슈를 보면서 저도 말을 잃었습니다. 불살이라는 신념을 스스로 깬 사람이 느끼는 무게가 그 장면 하나에 다 담겨 있었습니다. 이후 죄책감에 무너진 바슈를 메릴이 곁에서 붙잡아 주는 장면도 인상적입니다. 과거에는 렘이 바슈에게 인간을 믿을 이유를 남겼다면, 현재에는 메릴과 밀리가 그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줍니다.
나이브스와의 최종 결전에서 바슈는 울프우드의 퍼니셔까지 사용하면서 자신의 불살을 새로운 방식으로 이어갑니다. 결전이 끝난 뒤 빨간 코트와 권총을 내려놓고, 쓰러진 나이브스를 업은 채 걸어가는 장면은 말보다 행동으로 보여주는 결말이었습니다. 화려하지 않아서 오히려 오래 남는 장면이었습니다. 이런 결말 방식에 대해 "너무 열린 결말 아니냐"는 시각도 있는데, 저는 개인적으로 이것이 최선이었다고 봅니다. 결론을 강요하지 않는 것이 바슈라는 인물에 어울립니다.
트라이건은 절대적인 신념을 끝까지 밀고 나갈 때 오는 특유의 쓸쓸한 감동이 있는 작품입니다. 가볍게 시작해서 묵직하게 끝나는 그 낙차가 핵심입니다. 아직 안 보셨다면, 초반부 몇 화를 그냥 편하게 틀어두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어느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저는 분명히 그랬습니다. 그리고 2023년에 새롭게 재해석된 《트라이건 스탬피드》도 1998년판과 달라진 설정과 전개를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이런 분께 추천합니다

✔ 개성 있는 주인공과 성장 이야기를 좋아하는 분
✔ SF와 서부극이 결합된 독특한 세계관을 즐기는 분
✔ 액션뿐 아니라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작품을 선호하는 분
✔ 1990년대 명작 애니메이션을 경험해 보고 싶은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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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기본 정보

  • 장르 : SF, 액션, 모험, 서부극(스페이스 웨스턴)
  • 방영 : 1998년 4월 1일 ~ 1998년 9월 30일
  • 화수 : 26화
  • 제작사 : 매드하우스 (MADHOUSE)
  • 원작 : 나이토 야스히로의 만화 《트라이건》
  • 공식 사이트 : https://www.b-ch.com/titles/396/

※ 참고

본 글은 작품을 직접 감상한 뒤 작성한 개인 리뷰입니다.